2008년 08월 17일
Energy
# by | 2008/08/17 16:25 | 기타 | 트랙백

# by | 2007/10/29 21:51 | 트랙백
| [현장속으로] 추억으로 사라져갈 현대의 고별전 | ||
| 스포츠서울 | 기사입력 2007-10-05 22:02 | 최종수정 2007-10-05 22: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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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는 경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을까? 5일 하늘은 화창하고 맑았다. 이날은 현대 유니콘스가 현대 유니폼을 입고 사실상의 고별전을 치르는 날로 기억될 수 있는 날. 한화와의 정규시즌 최종전이 끝나면 현재 인수를 검토중인 STX그룹 또는 제 3의 기업에 넘어가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공중분해될 개연성이 높다. 이 모든 경우가 현실화될 경우 한국시리즈 4회 우승 등 프로야구사를 풍미했던 '현대'라는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수원구장 기자들 북적
올시즌 현대는 언론의 구미를 당기는 구단은 아니었다. 스타선수도 없고 시즌 성적도 뛰어나지 않았다. TV에서도 외면받아 중계를 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현대 덕아웃엔 기자들이 넘쳤다. '현대 고별전'의 현장을 기록에 담으려는 기자들은 여기저기서 열심히 펜을 굴렸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기자들의 관심이 포스트시즌 열기를 넘어선다"며 웃었지만 그 웃음속엔 묘한 서글픔이 묻어났다.
◇감독도 선수도 아쉬움 속 내일의 '희망'노래
감독도 선수들도 아쉽기는 매 한가지였다. 현대의 마지막 감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가능성이 커진 김시진 감독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구단과 프런트에 감사한다. 하지만 내년에 다른 유니폼을 입더라고 야구는 계속하기 때문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현대 역사의 산 증인인 정민태도 "현대가 창단되면서 프로야구 발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 앞으로 현대라는 이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달랬다. 최다경기출장의 새기록을 쓰고있는 전준호도 "현대로 오면서 기록도 세우고 우승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 좋은 기억이 많은데 마지막이 됐다. 현대 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화 정민철도 "현대같은 명문팀이 사라져 아쉽다. 같은 선수로써 다른 기업에 인수돼도 잘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모두들 현대라는 이름이 마지막임을 전제로 한 소회를 풀어냈다.
◇아듀 2007 시즌, 아듀 유니콘스
오후 8시 53분 경기는 마침내 경기는 끝났다. 현대는 이 마지막 밤을 함께한 팬들에게 운동장을 개방하고 선수들의 사인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잊지 못할 선물을 줬다. 이날 수원구장을 찾은 1444명의 팬들은 운동장을 밟고 평소 좋아하는 선수와 사진을 찍었다. 유니폼을 가져와 사인을 부탁한 팬들도 있었고 기념구를 가져온 팬들도 있었다. 김시진감독은 자신의 사인을 받으며 울음을 터뜨린 여대생들을 보고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담담하려 했지만 결국 솟구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햇다. 현대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 by | 2007/10/06 00:55 | 야구 | 트랙백
| "나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다" | |||||||
|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10-01 18:16 | 최종수정 2007-10-01 18:26 | |||||||
어제(9월 11일) 현대 수원전에서 좋은 볼이 거의 안 들어오던데. 상대투수들이 좋은 볼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늘 이를 전제하고 타석에 들어선다. 전에는 상대투수가 고의4구나 피하는 투구로 볼넷 내주는 걸 무척 싫어했다. 타자는 아웃이 되더라도 때리고 아웃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볼을 치지 못하다 보면 타격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프로생활을 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요령이 생겼다. 요즘에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가 뒤 타자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한다. 득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기분도 나쁘지 않다. 야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중대초등학교 4학년 때 반대항 야구경기에 나가 선생님들 눈에 띈 게 인연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가장 좋아한 게 야구였다. 그렇게 시작한 게 벌써 20년이 넘었다(웃음). 세월 참 빠르지 않은가. 요즘 고교생들은 박찬호를 보고 야구를 시작했다고 하던데 나 역시 우상이 있었다. 한화 2군 감독으로 계신 최동원선배다. 그분 때문에 야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셨다. 운동선수의 삶이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금전적인 부담이 가장 컸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반대하신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배트를 쥘 수 있었나. 어머니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파출부, 포장마차 등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내 뒷바라지에 당신의 인생을 모두 건 것이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어머니를 보며 야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순수하게 야구만을 좋아했던 마음이 점점 독하게 변했다. 집안에 도움이 되는 아들이 돼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 고생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당시 야구와 집밖에 몰랐다고 하던데. 중고등학교 때 야구 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야구로 성공하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팀 훈련 외에 따로 배트를 휘두르며 타격연습을 했다. 개인훈련이 끝나면 언제나 어두운 밤이었다.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는 새벽까지 훈련했다. 그때만 해도 널리 보급이 안 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몸을 가꾸기도 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마 지금 그때처럼 훈련하라고 하면 못할 거다. 고교 1년 선배 이경필의 말에 따르면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다고 하던데. 여자친구도 없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도 않았다(웃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돈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OOO선수, 사상 최고액 계약’이라는 신문 기사. 그런 문구를 보면서 사상 최고액 앞에 내 이름을 달아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당시 배명고 전력은 상당했는데. 웬만한 대학팀을 이길 만큼 막강했다. 선수 전원이 야구를 잘했다. 이경필, 장성국, 조현, 노상진이 1년 선배고 최용호, 김유봉, 윤근주가 1년 후배다. 현대에서 투수로 뛰는 (황)두성이도 당시 포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선후배들의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중간에 있는 내가 분발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시절 라이벌로 거론된 김재현은 프로에 입단해 신인 첫 20-20을 달성했다. 고려대 입학을 후회한 적은 없었나. 없었다. 고교시절 김재현에 대한 질투심이나 부담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남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고려대 분위기가 엄해 그럴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힘든 4년이었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 아마 그 시절이 없었다면 프로에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거다. 좋은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나. 뛰어난 선후배들을 만나 야구에 관련된 많은 지식과 강한 정신력을 배웠다. 투지와 의지력은 그때 얻은 최고의 자산이다. 선배들은 매우 엄격했다. 매도 많이 맞았다. 그러나 프로처럼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야구를 할 수 있었다. 고려대 3학년 때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당시 연세대 김충남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는데 고려대라는 이유만으로 뽑히지 않은 것 같아 절망했다. 대학리그에서 MVP도 되고 타격왕도 휩쓸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프로지명을 받고서도 대학행을 결심한 건 애틀랜타올림픽 때문이었다. 꼭 출전하고 싶은 대회였는데. (말을 멈추다)편파적인 결정으로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힘들어 할 때 김호근 코치(현 한화 코치)가 마음을 많이 달래주셨다. 소주를 함께 마시며 분을 누그러뜨렸던 기억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아마추어 시절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는데. 유격수를 많이 보긴 했지만 사실 거의 전 포지션에서 뛰었다. 1992년 봉황대기대회에서는 최우수투수도 되지 않았는가(웃음). 프로에서 3루수를 맡게 된 계기가 있나. 타격에 집중하고 싶었다. 3루수는 다른 포지션에 비해 수비 부담이 적지 않은가. 프로에 와 김인식 감독이 ‘어떤 포지션을 맡고 싶냐’는 질문에 냉큼 ‘3루수’라고 했다. 물론 3루수는 절대 쉬운 포지션이 아니다. 유격수가 병살 플레이나 상대팀 번트에 대비해 움직임이 많다면 3루수는 빠른 타구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하고 그만큼 부상 위험도 많다. 그러나 입단 첫 해 외야수로 뛰었다. 김인식 감독이 한 해 동안 외야수를 맡으며 프로무대에 적응하라고 했다. 당시 OB 외야진은 내야진에 비해 타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한 시즌을 소화한 뒤 포지션에 대해 김인식 감독과 다시 면담했다. 끝까지 3루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다음 시즌부터 3루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 1998년 1차 지명 됐다. 지명일이 다가올수록 이런저런 제안도 많아지고 관련된 소문도 무수히 많았다. 나 하나를 둘러싸고 두 팀이 경쟁을 한다는 건 선수로서 기분 좋은 일이다. 사실 고교졸업 때까지만 해도 어느 팀이든 상관없었다. OB는 나를 잡기 위해 대학시절에도 끊임 없이 접촉하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애착이 많이 갔다. 1998년부터 두산 중심타선인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는 ‘우동수 트리오’로 불리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강의 중심타선이었다. 중심타선뿐만 아니라 선수 전원이 모두 잘했다. 정수근, 박명환, 진필중, 심정수, 우즈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한 팀에서 뛴 건 이제 생각해도 영광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는데 마치 꿈만 같다. 그런 팀의 일원으로 뛰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자긍심을 느낀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많다. 두산이 다시 그런 팀으로 변한다면 상대투수들의 심장이 잠시라도 멎지 않을까. 그때와 현재의 두산에 차이가 있다면. 현재 두산에는 그때만큼의 가공할 만한 힘이 없다. 하지만 선후배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선수들이 편안하게 경기를 한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잘 이끌고 후배들 또한 잘 따른다. 톱니바퀴의 연결처럼 짜임새 있는 야구를 하게 된 거다. 현재 두산의 성적이 괜찮은 걸 보면 실력보다도 중요한 것이 팀 분위기라는걸 느낀다. 데뷔 첫해인 1998년 전반기 활약은 대단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부진했는데. 매일 경기를 치르는 게 체력적으로 부담이 됐다. 또 매번 똑같은 투수만 보던 아마추어 시절과 달리 1~5선발로 구성된 마운드를 상대하는 것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부진했지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당시 두산은 시즌 막판 8연승으로 해태를 누르고 포스트시즌에 턱걸이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마무리였던 (임)창용이 형이 선발투수로 나와 그날 경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포스트시즌 티켓이 걸린 중요한 경기여서 두 팀 선수들 모두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나섰다. 나 역시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배트를 꽉 쥐었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살벌했다. 거의 죽기 살기로 이뤄낸 승리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2000년 타율 3할3푼9리, 31홈런, 106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입단 뒤 2년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기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프로생활에 적응이 돼 그런 것 같다. 두산은 팀 컬러 자체가 열심히 하는 팀이라 프로 적응에 더 도움이 된 것 같다. 배워야 할 점을 가진 동료들도 많았고. 그 가운데 한 명을 꼽는다면. (잠시 생각하다) 타이론 우즈다. 우즈는 현재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가 아닌가. 영광은 절대 손쉽게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경기를 준비했다.
개인적으로 친하기도 했는데 한국을 떠난다고 했을 때 무척 아쉬웠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던 걸 옆에서 지켜봤기에 잘 되길 바랐는데 그렇게 돼 정말 다행이다. 우즈가 떠났을 때 남은 선수들끼리 우즈 몫까지 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우즈에게 배운 점은 무엇인가. 타석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모두 가르쳐줬다. 타격자세부터 배팅 각도까지 상세한 내용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줬다. 세부적인 기술을 말하다 대화가 막히면 통역을 불러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상대투수들은 우즈와 나에게 던지는 볼의 배합이 비슷했다. 우즈 타석에서 투수가 공을 어떻게 배합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타석에 들어서면 안타를 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2000년 현대와 치른 한국시리즈에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벤치에서 아쉬움이 컸을 듯한데. 그때 아쉬움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플레이오프 이전부터 손가락이 부러진 상태였다. 통증이 심해 김인식 감독에게 “수술하고 싶다”했더니 “한 번만 참고 뛰어달라”고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예”라고 말한 뒤 주사를 맞고 출전을 강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시리즈에서 뛰지 못할 정도로 악화될 줄 몰랐다. 벤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김인식 감독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6년 동안 나를 믿어준 분이다.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다. 프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셨다. 지금의 나를 만든 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해 WBC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도 많은 애정을 쏟아주셨다. 최근에도 한화와 경기를 할 때면 찾아가 인사 드리는데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2001년 현대와 치른 플레이오프에서 12타수 1안타로 부진했다. 그러나 팀은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그때 현대전에서 정말 못 쳤다. 너무 답답해 한국시리즈 이틀을 남겨두고 술만 마셔댔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기분이 매우 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술을 실컷 마시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시리즈에서 방망이도 잘 맞고.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3할8푼5리, 1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직도 그 홈런 한 방을 잊지 못한다. 한국시리즈에서 친 홈런의 짜릿함은 아마 아무도 느끼지 못할 거다. 프로에서 처음 우승해 야구 인생 최고로 기분이 좋았다. 우승한 뒤 한 달 동안 술만 마셨다. 마시고 싶지 않아도 부르는 술자리가 매일같이 생겼다. 한창 잘 마실 때 평균 주량이 소주 10병 반이었다. (잠시 생각하다) 나만큼이나 게리 레스도 술을 잘 마셨던 기억이 난다(웃음).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깨 부상 이후에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2004년 사생활 문제에 시달리다 은퇴를 선언했는데. 이혼한 뒤 금전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결정한 거다. 연봉의 상당액이 전처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사정을 모르는 분들께서 돈밖에 모른다는 이야기를 해 더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내 결정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할 거였다면 전처와 이혼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아이들한테는 미안하다.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괴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도 전처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 소송을 걸어 재조정한 상태다. 전보다 훨씬 금액이 줄어들었다. 판결에 만족한다. 은퇴를 선언한 뒤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막노동을 하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티기조차 힘든 작업을 매일같이 한다. 그분들과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돈의 소중함도 알게 됐지만 무엇보다 야구의 소중함을 알게 돼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다시 그라운드를 밟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그냥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게 전부다. 힘든 시절 자신을 바로 잡아준 사람이 있다면. 고(故) 정귀창 배명고 감독이다. 내가 야구를 할 수 있게 길을 터 주신 분이다. 매도 많이 맞았지만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이었기에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집안이 어려워 회비를 내지 못했을 때 따로 돈을 넣어주셔서 야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 은혜를 모두 갚아야 하는데 하늘나라에 계셔서 안타까울 뿐이다. 12월 열리는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할 가능성이 높은데. 4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최고 선수들로 구성되는 팀이지 않은가. 타순보다도 나가서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경문 감독이 사령탑을 맡으셨으니 더 그래야 할 것 같다. 국가대표 경험이 많은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하도 많이 나가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없다. 사실 내게 국가대표라는 명예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후배들에게 양보해 도움을 주고 싶다. 그게 더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일본대표팀과의 경기에 많이 출전했는데 인상 깊었던 선수가 있나. 없다. 그냥 다 해볼 만했다. 잘하는 선수들이 한국보다 많은 건 사실이지만 야구는 해봐야 아는 것 아닌가. 그날 컨디션도 중요하고 운도 크게 작용하는 게 야구다. 우리 선수들이 특별히 이기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일본과의 예선리그에서 결승 3점홈런을 쳤는데. 당시 일본과의 2경기를 모두 이겼는데 멤버 전원이 군 문제가 걸려 있어 이겨야겠다는 마음이 어느 대회보다도 강했다. 다들 이를 악물고 경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무조건 이겨야겠다는 투지 때문에 두 경기에서 13점씩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 일본전에서는 5안타에 그치며 완패했다. 그때 내 성적이 어떻게 되나? 일본전 3타수 무안타, 대만전 5타수 무안타였다. 당시 운동을 많이 하지 못해 부진했다. 합숙기간도 짧았고 연습도 많이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렀다. 사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만에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만에게 지고 경기장을 나오는데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국가대표 경기에서도 4번을 많이 쳤다.4번 타자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해결해야 할 찬스가 가장 많이 오는 게 바로 4번 타자다.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한 타순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앞선 타자들이 살아나갔을 때는 ‘못 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부담도 많이 느낀다. 그게 4번 타자만의 고민이자 풀어야 할 과제다. 타격감이 좋을 때는 어떨 때인가. 컨디션이 좋으면 말 그대로 공이 수박만 하게 보인다. 남들 눈에는 상대투수 공이 빠르거나 변화구 각이 커도 내 눈에는 평범하게 보인다. 구단에서 라커룸에 있는 TV로 상대투수 투구동작을 보여주는데. 자주 보나. 전혀 보지 않는다. 난 타석에서 그저 상대투수의 공만 보고 칠 뿐이다. 상대투수의 투구습관에 대해 듣고 타석에 들어서면 더 못 치게 된다. 데이터는 참고하기는 한다. 공 배합 등은 알아두면 타석에서 도움이 된다. 하지만 투구폼을 분석하지는 않는다. 타석에서는 오로지 공만 보고 배트를 휘두른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잘 알려주나. 그런 편이다. 타격을 지켜보다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따로 불러 이야기를 해준다. 어제도 (김)현수에게 스윙 자세에 대해 조언했다. 후배들이 성장하면 뿌듯하다. 가장 편한 구장은 어디인가. 잠실구장이다. 팬들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장 공이 잘 보인다. 글자 그대로 내게 홈구장이다. 지난해 3월 WBC 1차예선 대만전에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를 다쳤다. 야구선수를 하면서 가장 크게 다쳤다. 더그아웃으로 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친 뒤 한국 경기를 관전했나. 거의 보지 않았다. 경기장에도 일부러 가지 않았다. 나 때문에 다른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안 되지 않은가. 호텔에서 TV로 중계를 지켜보다 답답해서 꺼버렸다. 부상을 당한 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동료들이 같이 있자고 해 끝까지 함께 있었던 거다. 재활을 위해 미국에서 두 달 반을 보냈는데. 부상도 부상이지만 사생활 문제까지 겹쳐 매우 힘들었다. 괴로움에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아파 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지금은 재활하는 선수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에 함께 간 홍성대 트레이너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애너하임에 도착했는데 둘 다 영어를 못해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재활센터 부근에 집을 얻었다.
그때 도와준 분이 (박)찬호 형 트레이너인 이창호 씨다. 병원도 예약해 주고 세부적인 사항까지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당시 나는 팔을 올리지도 못했는데. (잠시 말을 멈춘 뒤)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경험이다. 통증이 어느 정도였나. 아무 것도 들지 못했다. 어깨가 쑤셔서 매일같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마사지 등을 하며 재활치료를 받았다. 두 달 동안 치료한 뒤 MRI와 CT촬영을 했다. 그때도 차도가 없으면 의사가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어깨에 이물질이 많이 사라졌다는 결론이 나왔다. 의사가 한국에 돌아가서 야구를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말과 달리 통증은 돌아올 때도 그대로였다. 일본프로야구의 경우 1군 등록 상황에서 국가대표 경기 도중 다치면 부상기간을 1군 등록일수로 인정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나. 2005년 프로야구선수협의회와 일본프로야구기구(NPB) 사무국의 승인으로 통과됐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많이 난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다쳤을 때 마음 편하게 갖고 있으면 알아서 자기네들이 처리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전화 한 통 없었다. 특별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었다. 화가 많이 났다. 내게 전화라도 해 이해를 구해야 하는 게 절차 아닌가. 선수로서는 이런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국가대표로 뽑혀도 출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나라를 위해 뛰겠다는 건데. (한숨을 내쉬며) 하루 빨리 제도적 보완을 서둘러 후배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상과 개인적인 문제 등으로 2004년부터 3년 동안 부진했던 게 사실이다. 시즌을 모두 치르는 건 4년 만인데 힘든 점은 없나.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제는 웃으며 경기에 나설 수 있다. 스프링캠프에서도 열심히 노력했다. 무엇보다 여자친구가 정신적으로 도움을 많이 줬다. 김지은 씨와 결혼을 앞둔 걸로 알고 있다. 12월 16일에 결혼한다. 어떻게 만났나. 아는 선배 소개로 만났다. 알면 알수록 좋은 여자라는 게 느껴져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게 됐다. 신중하게 생각한 뒤 교제 한 달 만에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낸 지 2년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도 있지만 장인 어른께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 반대가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설득해 지금은 친아들처럼 대해 주신다. 잠실구장에서 점심을 먹지 않는 걸로 안다. 홈경기를 치를 때마다 여자친구가 음식을 만들어 온다. 요일별로 영양가를 계산해 식단을 짠다. 참치밥이나 포도, 자두 등을 자주 먹는다. 고기는 자주 나오지 않는데 가끔 나오면 행복하다(웃음). 여자친구에게 잘 해주고 싶다. 내 뒷바라지 때문에 얼마 전 하나투어 가이드도 그만 뒀다. 정말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여자친구 외에 인생을 함께 걸어가고 싶은 선수가 있다면. LG에서 뛰는 (박)명환이다. 두산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다. 같은 팀이었을 때 (장)성진이와 함께 야구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부진에 빠지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옆에서 지켜보다 정신 차리라고 따가운 말을 해주기도 한다. 팀이 바뀐 뒤로는 야구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전화통화로 안부를 묻거나 야구 외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휴식시간에는 주로 무얼 하나. 눈을 붙이거나 컴퓨터 게임을 즐긴다. 게임은 그냥 심심해서 하는 거다. 영화를 좋아하긴 하는데 극장에 가지는 않는다.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도 자게 된다. 주로 집에서 DVD로 본다. 영화는 누워서 봐야 제 맛이다(웃음). 최근 본 영화 가운데 <미녀는 괴로워>가 가장 재미있었다. 내 테마송으로 나오지 않는가. 일본프로야구는 즐겨보나. 보긴 보는데 어느 팀이 잘하고 못하는지는 잘 모른다. 크게 관심을 갖고 보는 건 아니다. 거의 (이)승엽이 경기 위주로 시청한다. KIA (이)종범이 형이나 한화 (정)민철이 형 이야기로는 일본에 가면 고생이 심하다고 하던데 부디 이를 잘 극복해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올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는다. 최근 일본행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큰 무대에서 뛰고 싶은 욕심은 있다. 하지만 3루수를 보는 조건이 아니라면 가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진로를 결정할 시기는 아니다. 솔직히 최근 일본행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밉다. 아직 시즌 중이고 팀이 중요한 시기인데 왜 자꾸 팀원들 앞에서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때에 나오는 일본행 기사 하나는 팀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 난 지금 두산 선수다.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 (잠시 말을 멈추다)사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돈이 중요하겠는가. 두산이 날 정말 필요로 한다면 아마 내년에도 두산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 계약금을 받고 무엇을 했나. 돈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는데 경기도 하남에 집을 한 채 사셨다. 현재 돈 관리는 누가 하고 있나. 매니저가 있다. 펀드 매니저는 아니고. 뭐 그런 게 있다. 어느 정도 이익을 본 상태다. 은퇴 뒤 진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나. 36살이 넘어가면 그 때 차차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은 선수 생활에 충실하고 싶다. 아직 은퇴를 생각할 만한 나이도 아니고. 당신 인생에서 야구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면 내 인생의 전부다. 야구가 없었더라면 내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테고 이런 인터뷰도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 평생 야구를 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야구는 미로와 같다. 20년을 넘게 해도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런데 그게 매력이다. 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냥 평범하게 회사를 다녔을 것 같다. 성격이 조용한 편이라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을 거다. 야구와 관련된 문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나. ‘야구로 성공하려면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문구는 아니고 정귀창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다. 배트를 쥘 때마다 자주 생각이 난다. 선생님은 야구는 단체운동이라고 강조하신 분이다. 당시 내가 주장을 맡고 있어서 더 그 말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당신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3루수’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르는데. 과찬이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선배들이 많다. 나는 현재 팀의 후배들과 자리 경쟁을 하는 처지다. 야구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은가. 지금 내가 서있는 자리를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게으른 천재’라는 말도 만만치 않게 들었을 텐데. 사실 왜 나를 보고 게으르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난 천재도 아니다. 아니 야구에는 천재가 없다. 어느 정도 재능은 있겠지만 다 노력하고 연구해서 발전한 거다. 대학시절까지 정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했다. 그런데 기자분들이 ‘천재’라는 표현을 써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것 같다. 못 먹으면서도 운동해 봤고 남들 다 잘 때 배트 휘둘러 이 자리에 섰다. 재능 하나만 가지고 타석에 들어섰다면 왜 경기 전에 배팅훈련을 하겠는가. 정말 이건 작은 소망인데 나중에 야구팬들이 나를 잘했던 선수보다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성격이 조용한 편이다. 말을 쉽게 꺼내는 걸 싫어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팀 마스코트인 곰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팀의 이미지라는 건 좋은 거 아니겠는가(웃음). 이보다 좋은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시즌을 마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나. 바다를 보고 싶다. 시즌 중이 아니면 혼자 동해 바다 보러 가는 걸 좋아한다. 겨울바다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탁 트인다. 마음이 편해진다고 할까. 힘들었던 시기에 자주 갔다. 바다에 갈 때마다 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음주운전을 할 수 없으니까 잠을 자고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 동해 바다에서 숙박한 적도 있다. 술과 함께 산 거다(웃음). 지금은 술도 안 먹고 혼자도 아니라 그러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둘이 가면 그 곳엔 또 다른 맛이 있지 않겠는가. SPORTS2.0 제 69호(발행일 09월 17일) 기사 수원, 과천=이종길 기자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 |
# by | 2007/10/01 22:46 | 야구 | 트랙백
| 김동주에 관한 상반된 시선 | |||||||||
|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10-01 17:51 | 최종수정 2007-10-01 18:46 | |||||||||
9월 11일 수원구장에서 두산과 현대의 경기가 열렸다. 오후 4시가 조금 안 돼 두산 선수들이 하나둘씩 원정팀 더그아웃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성, 한화와 2위 경쟁을 하고 있는 두산에게는 남은 경기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선수들 얼굴은 밝았다. 8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오른손 중지가 부러진 안경현이 복귀했고 선참 투수 이경필도 1군에 등록됐다. 몸을 푼 선수들이 수비훈련을 마치고 배팅훈련을 시작했다. 경기장 외야에는 어느새 관중 몇몇이 모여 홈런 볼을 기다렸다. 담장을 넘기는 타구가 없자 관중들은 “좀 세게 쳐봐”라고 소리를 질렀다. 타석에 김동주(31)가 들어섰다. 김동주는 공 5개를 외야 스탠드로 날려보냈다. 관중들은 날아온 공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공을 줍지 못한 김상만(32) 씨가 소리쳤다. “김동주답게 하나만 더 쳐봐.” 그러나 공은 외야 펜스를 못 미쳐 떨어졌다. 프리배팅은 그걸로 끝이었다. 김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 김동주는 어디 간 거야.” 김씨의 말과 달리 김동주의 올시즌 성적은 뛰어나다. 9월 12일 현재 타율은 3할3푼6리다. 생애 최고인 2003년 3할4푼2리를 넘어설 수도 있다. 홈런도 19개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타자에게는 많은 수치다. 그렇다면 김씨는 왜 ‘옛날 김동주’를 찾은 걸까. 아마 그에게 김동주는 여전히 ‘최고의 선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성적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유망주를 넘어선 유망주 김동주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최고의 선수였다. 재주가 많았다. 배명고 2학년 때인 1992년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에 유격수로 출전해 고교야구 단일대회 최다홈런 기록(18개)을 세웠다. 1번 타자를 맡을 정도로 발도 빨랐다. 배명고 선배인 이경필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동주는 매우 날렵했다”고 말했다. 김동주의 괴력은 타석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도 빛났다. 시속 145km의 빠른 직구는 상대타자들의 방망이를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당시 포수로 김동주의 공을 받았던 황두성(31, 현대)은 “경기 후반에도 구속이 줄어들지 않았다”며 “직구도 좋았지만 슬라이더와 커브의 각이 날카로웠다”고 회상했다. 김동주의 투타 활약에 힘입어 배명고는 경남고를 누르고 봉황기를 품에 안았다. 대회 최우수투수상, 타격상, 타점상은 모두 김동주에게 돌아갔다. 김동주의 대회 방어율은 0.80, 타율은 6할이었다. 그때 배명고는 대학팀들과 자주 연습경기를 가졌다. 단국대와 경기가 가장 많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국대를 지휘하고 있는 강문길 감독은 경기 때마다 김동주를 유심히 지켜봤다. 강감독은 “단국대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실패했다”며 “연습 경기 때마다 상당한 실력을 뽐내 탐이 났다. 유망주를 넘어선 유망주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눈길은 강감독만 보낸 게 아니다. 3학년이 되지 않았음에도 프로구단들과 대학팀들 거의 모두 김동주를 주목했다. 강감독은 “당시 모든 대학팀이 동주의 영입에 발벗고 나섰다. 프로 쪽도 만만치 않았다. 말 그대로 스카우트 전쟁이었다”고 떠올렸다. 황두성은 “스카우트 제의가 끊이지 않았지만 정작 동주 형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동주의 선택은 고려대였다. 김동주는 입학 전부터 고려대와 인연이 있었다. 고교시절 고려대 조두복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김동주의 결정에 속이 상한 동기들도 있었다. 당시에는 뛰어난 실력의 선수가 대학에 진학할 경우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 몇몇이 함께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고려대에 진학한 배명고 선수는 김동주 하나뿐이었다. 황두성은 “당시 동주 형 동기들이 많이 섭섭해 했다”고 밝혔다. 그때 고려대는 대학 최강팀이었다. 김동주의 선배인 김종국, 심재학, 홍원기 등은 쟁쟁한 대학스타로 국가대표를 지냈다. 함께 입학한 손인호(32, LG)도 이 가운데 하나였다. 김동주가 입학한 뒤 고려대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전국대학대회 10개 대회를 석권했다. 원동력은 엄청난 훈련량이었다. 손인호는 “당시 웨이트트레이닝도 많이 하고 러닝도 쉴 새 없이 했다. 한여름에도 훈련량은 그대로였다”며 “다른 체육부에서 우리를 ‘고려대 육상부’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동주 역시 “대학시절 훈련량은 지금 프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된 훈련에 선후배 간 ‘군기’마저 엄격했다. 구타도 빈번했다. 손인호는 “특히 연세대와 경기를 앞둘 때면 기강이 점점 세져 긴장이 배가 됐다”고 털어놨다. 김동주가 졸업반이 되자 프로구단에서는 최고의 선수가 프로무대에 나선다며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경쟁은 없었다. 김동주의 연고지 구단인 서울의 LG와 OB는 당시 격년제로 1차 지명 우선권을 나눠 갖고 있었다. 전년도에 이병규를 LG에 내준 OB는 두말할 것도 없이 김동주를 선택했다. OB는 4년 전에도 김동주를 데려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김동주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김동주는 첫해 홈런 24개를 날렸지만 타율 2할6푼5리에 출루율은 3할1푼에 그쳤다. 전반기 성적은 좋았지만 후반기에 부진했다. 그러나 이듬해 출루율은 3할9푼으로 높아졌고 그 뒤로는 해마다 4할대였다. ‘천재’라는 평가는 입증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재’ 앞에 ‘게으른’이라는 수식어는 없었다. 영광과 악재 1999년 두산팬들은 베어스를 ‘미라클 두산’이라고 불렀다. 박명환, 진필중, 심재학, 정수근, 심정수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한 팀에 모였다. 여기에 역대 최고 외국인 타자로 꼽히는 타이론 우즈까지 가세했다. 우즈-김동주-심정수는 역대 최강의 중심타순이었다. 1999년 ‘우동수 트리오’는 홈런 87개, 295타점을 합작했다. 이해 심정수의 타율은 3할3푼5리로 생애 최고다. 2000년에도 세 선수는 홈런 99개, 308타점을 합작했다. 2001년 심정수가 떠나고 심재학이 들어왔지만 중심타순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홈런 76개, 263타점을 함께 만들었다. 이때 기록한 심재학의 타율 역시 3할4푼4리로 그의 생애 최고 기록이다. 따지고 보면 막강 중심 타순은 1998년 김동주의 입단으로 시작된 것이다. 1998년 두산은 5위로 시즌을 마감하는 듯했지만 타선에서 우즈, 김동주의 활약으로 시즌 막판 8연승을 거둬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상승세는 2000년 준우승, 2001년 우승으로 이어졌다. 김동주의 2000년과 2001년 포스트시즌 성적은 극과 극을 달린다.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현대는 정민태, 정명원, 임선동, 김수경의 선발진을 앞세워 역대 한 시즌 최다승인 91승을 거둔 팀이었다. 김동주는 플레이오프에서 타율 4할2푼9리를 기록해 현대 마운드를 무너뜨릴 주인공으로 꼽혔다. 그러나 손목 부상으로 4번 자리는 최훈재에게 내줘야 했다. 우승의 꿈은 7차전 두산 선발 조계현이 현대 탐 퀸란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날아갔다. 그렇다면 2001년은 어떨까. 김동주의 플레이오프 타율은 8푼3리에 그쳤다. 어렵게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상대는 삼성이었다. 그러나 김동주는 거짓말처럼 컨디션을 회복하며 한국시리즈에서 26타수 10안타, 1홈런, 8타점으로 맹활약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두산은 1회 8점을 내준 뒤 곧바로 12득점하는 저력을 보였다. 선봉장은 김동주였다. 김동주는 고(故) 박동희에게 만루홈런을 때려내며 시리즈의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이후에도 김동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2003년 생애 최고인 타율 3할4푼2리를 기록했다. 두산 김광림 코치는 김동주의 타격에 대해 “슬러거지만 욕심 부리는 큰 스윙을 하지 않아 밸런스를 잘 유지한다”고 말했다. 김코치는 “공을 무조건 치지 않는다. 자기 존에 들어왔을 때만 배트를 휘두른다”고 덧붙였다. 김동주는 더그아웃에서 상대투수를 유심히 관찰한다. 투수의 투구동작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공 배합에 대한 분석을 한다. 김코치는 “늘 공부하려는 자세가 타격을 잘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며 “장타력은 타고 났다”고 말했다. 김동주는 2000년 5월 4일 롯데전에서 잠실구장 개장 이래 첫 장외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비거리는 150m로 그때까지 한국프로야구 최장기록이었다. 올해 롯데 이대호가 4월 21일 사직 현대전에서 타이기록을 세웠다. 그런 김동주에게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투수의 공이 어려워진 게 아니었다. 가정생활이 이유였다. 2003년 12월 김동주는 다섯 살 연상의 아내와 이혼했다. 시련은 이어졌다. 오른 손바닥과 왼 발목을 다쳤다. 어머니의 지병은 악화됐다.
김동주는 “그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말했다. 2004년 10월 19일 김동주는 두산 구단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은퇴 의사를 밝혔다. 두산 구단은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러나 김동주는 휴대전화를 꺼놓고 지방으로 잠적했다. 그의 행방에 대해 많은 소문이 이어졌다. 이상훈, 유지현, 박정태 등 굵직한 스타들이 은퇴한 상황에서 두산 중심타자인 김동주의 돌연한 은퇴선언은 야구계에 큰 충격이었다. 팬들은 김동주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김동주는 “막노동을 하며 걱정, 근심을 잊어보려고 했다. 동해 바다를 찾아가 많은 생각을 했는데 떠오르는 건 야구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은퇴선언 한 달이 넘은 11월 25일 김동주는 자신의 인터넷 팬카페에 ‘드디어 운동을 시작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멋진 모습으로 복귀하려 한다’는 글을 올려 복귀할 뜻을 비쳤다. 우즈마저 떠나 중심타순이 빈약했던 두산 타선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김동주가 다시 그라운드를 밟았을 때 팬들은 그를 ‘게으른 천재’라고들 했다. 그 이미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연습벌레 타석에 다시 선 김동주는 2005년 시즌 홈런은 10개에 그쳤지만 타율 3할(0.302)을 넘기며 제 기량을 회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3월 3일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차예선 대만전에서 1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어깨가 탈구됐다. 그리고 5개월 가까이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프리에이전트(FA) 자격 취득을 1년 앞두고 있어 몸과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김동주는 “당시 야구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며 “이를 악물고 재활했다.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김동주는 수술을 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재활을 마쳤다. 재활을 하는 데는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김동주는 지난 시즌 후반 타석에 등장해 타율 2할5푼을 기록했다. 손인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상당한 친구다. 뭐랄까. 연습벌레다. 연습벌레”라고 말했다. 김동주는 고교시절부터 선수들 사이에서 승부근성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황두성은 “동주 형은 팀 내 리더 역할을 했다. 그러면서도 팀 훈련을 한 뒤 밤늦게까지 배트를 휘둘렀다”고 기억했다. 황두성은 “동주 형은 당시 배명고 선수들의 본보기였다”고 덧붙였다. 요즘도 고교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산 신인 임태훈은 “국내 최고의 3루수라는 이유만으로 게을러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보이지 않게 더 많이 훈련한다”고 말했다. 외야수 김현수도 “무뚝뚝해 보이지만 타격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최고 선수에게 조언을 받는 거라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고 했다. 다니엘 리오스는 김동주에 대해 “정확성과 파워가 뛰어난 한국 최고의 타자다. KIA에 있을 때 몸이 둔해 보여 수비를 제대로 못할 줄 알았는데 어려운 타구를 잡는 걸 보고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리오스는 “매우 열심히 훈련하는 선수다. 좋은 실력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김광림 코치는 “팀 타선에 동주가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동주가 열심히 뛰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뚝뚝해 보이는 데다 팀 이탈 파문까지 일으킨 김동주는 오만하거나 게으른 천재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두산 동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야수 고영민은 올시즌 3번으로 타순이 바뀌면서 이득을 많이 본다. 고영민은 “상대투수들이 동주 형을 피하고 나와 승부하다 보니 스트라이크가 많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김동주의 성적 또한 이전 실력을 회복하고 있다. 9월 13일 현재 타율 3할3푼6리, 홈런 19개, 75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타율 1위 이현곤과는 1리 차이다. 김동주는 올시즌이 끝나면 1년 미뤄졌던 FA자격을 얻는다. 김동주는 거취에 대해 입을 다문다. 두산은 어느 구단보다도 김동주의 가치를 아는 팀이다. 두산 한영준 코치는 “동주가 타선에 없을 때와 있을 때는 하늘과 땅 차이다”라고 말했다. 두산 김진 사장과 김승영 단장은 운영팀에 김동주를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해 놓고 있다. 다시 수원구장. 4번 타자로 출전한 김동주는 이날 볼넷만 3개 얻어냈다. 김동주는 “예전에는 볼넷을 매우 싫어했는데 요즘은 즐기면서 타석에 선다”고 말했다.
현대의 선발투수 장원삼은 “경기 전에 정명원, 조규제 코치가 주자가 없을 때 김동주에게는 성급하게 승부하지 말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이날 교체 출전한 현대 포수 유선정도 “장타를 맞지 않으려고 투수들에게 무조건 낮게 제구하라고 요구했다”며 “(이)동학이 형이 김동주 선배를 상대했을 때 원바운드 볼을 던진 건 최대한 낮게 던지려다 나온 실수였다”고 전했다. 안타는 없었지만 이날 김동주는 홈런성 타구를 하나 때려냈다. 두 번째 타석에서 받아친 장원삼의 공은 펜스 근처까지 날아가더니 중견수 송지만에게 잡혔다. 2m정도만 더 뻗었어도 담장을 넘어갈 타구였다. 김동주에게는 썩 기분 좋지 않은 타구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스탠드에 있던 김상만 씨는 크게 소리쳤다. “옛날 실력 그대로네.” 이경필이 말하는 김동주 김동주와 특별한 사이로 알고 있다. 내가 1년 선배인데 중대초, 배명중, 배명고를 거쳐 두산에서도 함께 운동하고 있다. 대학생활 4년을 빼고는 늘 같은 팀이었다. 나는 한양대에 진학했는데 동주는 고려대에 갔다. OB에서 재회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무척 반가웠다. 고교시절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프로에서도 다시 한 번 여오강의 순간을 이뤄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김동주는 어떤 선수였나. 동주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 왔는데 당시엔 지금처럼 덩치가 크지 않았다. 야구는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했던 걸로 기억한다. 동주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살이 찌기 시작했는데 뚱뚱한 건 아니었고 우람했다. 그게 그건가(웃음). 아무튼 엉덩이가 커서 별명이 '엉덩이'였다. 이 인터뷰 보면 상처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고교시절 꽤 날렵했다고 들었다. 도루도 잘하고 야구센스도 뛰어났다. 투수로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직구 평균 구속이 145km 정도였는데 커브와 슬라이더도 좋아 마운드에 오르면 상대타자들이 헛스윙 하기 바빴다. (잠시 생각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3루수를 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유격수 수비가 좋았지만 삼성 박진만 때문에 골든 글러브를 받기가 어렵지 않았을까(웃음). 농담이다. 타격은 어땠나. 한 대회에서 홈런만 8개를 때려낼 정도로 엄청났다. 고교시절 이미 야구관계자들에게 장타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아마 그 당시 고교선수 가운데 최고였을 거다. 열심히 훈련한 결과다. 남들이 쉴 때도 끊임없이 방망이를 돌리곤 했다. 상대팀에선 동주가 타선에 있는 것만으로도 겁을 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시간이 꽤 흘렀지만 동주는 여전히 무서운 타자다. 그때 김동주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던데. 야구선수 가운데 집안 형편 좋은 선수가 몇이나 있겠는가. 동주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집이 어려웠지만 야구를 잘해 당시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걸로 안다. 불과 15년 전인데 그때는 참 야구를 힘들게 했다. 투구를 마친 뒤 하는 아이싱도 없었다. 대신 사우나에 들어가 근육을 풀었다. 후끈거리는 방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땀이 많이 나던지. 나와 동주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모든 선수들이 다 그런 과정을 겪었다. 김동주는 고(故) 정귀창 배명고 감독을 최고의 은인이라고 말하던데. 특별하신 분이었다. 당시 정감독님 등번호가 52번이었는데 '오기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혹독한 훈련을 시켰지만 그만큼 선수들을 믿었다. 동주나 나나 감독님 밑에서 야구 외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김동주는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가. 말을 쉽게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할 말만 한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어른같이 점잖았다. 그렇다고 선수들과 아예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건 아니었다. 후배들에게 타격 노하우도 알려주고 선배로서 역할도 잘했다. 장난도 은근히 많았다. 그건 지금도 그대로다. SPORTS2.0 제 69호(발행일 09월 17일) 기사 수원, 과천=이종길 기자 |
# by | 2007/10/01 22:43 | 야구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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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7/09/30 17:41 | 야구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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